밸류트랩에 빠지지 말라
요즘 투자유치나 매각 관련해서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아직 발이 꼬이지 않은 대표들을 위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밸류트랩(Valuation Trap)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밸류가 높으면 자금 조달을 크게 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유기적, 비유기적 스케일업도 용이하다. 한때는 투자 밸류가 성공의 척도처럼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기에 다들 밑도 끝도 없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펀더멘털의 근거도, 멀티플의 논리도 취약하거나 억지로 갖다 붙인 경우가 태반이다. 때로 누군가가 펀더멘탈 대비 아주 높은 멀티플을 인정받기도 하는데, "나는 왜?"라는 생각을 가지시는 대표님들도 있는 것 같다.
에쿼티도 본질적으로는 빚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투자된 금액이 아무리 에쿼티(Equity) 투자라 해도 보통주가 아닌 이상 본질적으로는 빚이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투자자가 엑시트를 통해 자금을 회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수 시장이 IPO 일변도로 제한된 국내 환경에서는 멀티플의 기준을 결국 상장 시장의 유사 기업(Peer Group) 멀티플로 수렴해서 보는 것이 맞다. 과거 비상장 시장의 유동성이 넘치던 시절의 높은 멀티플에 익숙해진 대표들은 상장사의 멀티플이 눈에 차지 않겠지만, 상장사를 몇 차례 경험해 본 바로는 그곳의 숫자가 진짜 본게임이고 냉혹한 "싯가"다. IR한다고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때로는 실적이 좋아져도 올라가지 않기도 한다.
높은 밸류로 받은 돈이 하는 일
높은 밸류로 받은 돈은 그만큼의 회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입으로 이어진다. 대규모 인력 채용, 물류센터 같은 물리적 자산(CAPEX) 확보, 과도한 R&D, 시장 점유율을 위한 마케팅 쏟아붓기, 그리고 무리한 M&A까지 다양하다. 문제는 이 중 많은 사례가 회수 실패로 끝나며 고스란히 매몰비용이 된다는 점이다. 자본의 효율성이 깨지는 순간, 창업자가 공언했던 성장과 수익의 약속은 무너지고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감만 남게 된다.
특히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과거 방식의 대규모 투자가 불필요해진 영역이 많아졌다. 기술이 사람과 설비의 역할을 대신하며 적은 자본으로도 폭발적인 효율을 낼 수 있는 시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전히 높은 밸류로 거액의 돈을 받아 무언가 거창한 것을 하겠다는 어프로치는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물론 시장의 멀티플 자체가 다르게 형성되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미국 자본을 받는 경우는 예외일 수 있으나, 국내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펀드의 만기도 다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좀비가 되는 길
과거에 높은 밸류로 투자를 받았으나 이후 그 수치를 지지할 만한 실적을 내지 못하면 기업은 좀비가 된다. 성장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해당 산업의 매크로가 급변하며 싯가가 토막 나면 법정관리나 회생, 폐업의 길로 들어선다. 실질적으로는 망했으나 마음대로 망할 수도 없어 수년을 좀비 상태로 연명하기도 하고, 애초에 생각지도 않던 꿈이나 논리를 급조해 투자자를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기도 한다. 기업 가치가 수천억 원, 1조 원이 넘어도 법정관리로 이어지는 사례는 생각보다 꽤 있고, 리픽싱을 거치며 대표자의 지분이 거의 남지 않게 되는 사례도 발생한다.
이에 관한 직간접 경험이 많은 만큼 상담을 하시는 분들에게 꼭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장밋빛 미래와 좋은 소식만 가득한 페이스북과 링크드인에서 실패 얘기는 금기에 가깝기 때문에, 많은 대표자들이 실제로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치 사업 실패는 모두 윤리적 문제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의외로 윤리적 문제보다는 그냥 망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약속의 어긋남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약속의 어긋남이 있다. 사업은 나에게도 약속을 지키고 남에게도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다. 내가 진심으로 꿀 수 있는 꿈을 꾸어야 한다. 단지 돈을 받기 위해 남이 꾸는 꿈을 내 것처럼 대신 꾸려고 하는 순간 사고가 난다. 내 마음속에 없는 남의 지도를 그리다 보면 결국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사업 체력에 맞게, 그리고 내 깜냥으로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투자 방식과 구조(Term)로 유치를 하는 것이 좋다. 높은 숫자에 취해 감당할 수 없는 족쇄를 차기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호흡으로 사업을 끌어가는 것이 창업자로서 자신과 타인에게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그래서 주위에는 두 부류가 남았다. 긴 호흡으로 10여 년 또는 그 이상 거북이처럼 쌓아올린 케이스, 그리고 투자를 거의 받지 않고 자생해서 짧은 호흡이지만 매우 현실적인 성장과 엑싯으로 연쇄 창업을 하거나 쭉 자기 페이스대로 사업 중인 케이스. 둘 다 방식은 다르지만 살아남았다. 결국 살아남아 끝까지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