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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배송 네트워크 라우팅의 AI 전환 — 배차와 경로 최적화에서 나타나는 변화

물류·배송 네트워크에서 배차와 경로 최적화는 기업들이 AI를 가장 오래, 가장 넓게 적용해 온 영역에 속한다. 유피에스(UPS)가 2012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2016년 미국 전역 배달망에 전면 적용한 경로 최적화 시스템 오리온(ORION, On-Road Integrated Optimization and Navigation)이 대표적이다. 당시 회사가 내건 목표는 기사 한 명당 하루 운행거리를 약 1마일만 줄여도 연간 5,000만 달러(약 730억원)를 절감한다는 것이었고, 전면 가동 이후에는 누적 절감·회피 비용이 3억~4억 달러(약 4,400억~5,800억원)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2026년에 나온 분석에서는 오리온이 연간 약 750만~1,050만 갤런의 연료를 절감하고 있다는 추정이 제시됐는데, 갤런당 3달러를 적용하면 약 330억~460억원 규모에 해당한다. 10년 넘게 운영되며 수치가 계속 갱신되는 흔치 않은 사례다.

왜 배차와 경로부터 AI가 먼저 들어가는가

배차와 경로 설계는 정형화된 의사결정의 전형이다. 차량 대수, 적재량, 배송 시간대, 도로망, 교통 데이터가 이미 숫자로 존재하고, 목표함수도 분명하다. 총 운행거리나 운행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제약조건을 지키면 된다. 이런 문제는 수학적으로 외판원 문제(TSP)나 차량 경로 문제(VRP)로 알려진 최적화 영역에 속하고, 수십 년 전부터 운용과학(OR) 알고리즘이 다뤄 왔다. 여기에 머신러닝이 더해진 것은 교통 패턴, 날씨, 과거 배송 성공률처럼 변동성이 큰 변수를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AI가 바꾼 것은 문제의 틀이 아니라, 그 틀에 넣는 입력값의 정밀도다.

이 영역이 먼저 움직이는 또 다른 이유는 비용 구조에 있다. 통계 조사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가 물류 컨설팅사 캐스케이디아(Cascadia)의 분석을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배송비 중 최종 구간(라스트마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41퍼센트에서 2023년 53퍼센트까지 올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물류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항목이 배송의 마지막 구간이라면, 그 구간의 핵심 변수인 경로와 배차에 투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숫자로 보면 무엇이 움직이나

도이체포스트DHL(Deutsche Post DHL) 그룹이 운송 최적화 플랫폼 업체 블루 욘더(Blue Yonder)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는 차량·정차 지점 최적화로 약 7퍼센트의 직접 운송비 절감을 냈다고 공개됐다. 같은 플랫폼을 쓴 한 대형 미국 유통업체의 경우 비용 절감 폭이 약 15퍼센트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경로 설계 업체 지오플랜(Geoplan)과 진행한 또 다른 창고(디포) 운영 최적화 사례에서는 기사 인건비 기준 6퍼센트의 운영비 절감과 함께 필요한 배송 경로 수 자체가 20퍼센트 줄었다고 발표됐다. 다만 이런 수치는 모두 솔루션 공급업체가 공개한 사례 연구에서 나온 것이어서, 제3자가 독립적으로 검증한 수치라기보다는 벤더와 고객사가 함께 발표한 성과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한계 — 알고리즘이 아직 못 따라가는 것

경로 최적화의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아마존과 MIT 교통물류센터가 함께 진행한 '라스트마일 라우팅 연구 경진대회'다. 아마존은 이 대회에서 229개 연구팀에 숙련된 배송 기사 4,000여 건의 실제 이동 경로 데이터를 제공하고, 과제를 '총 이동거리를 최소화하는 경로'가 아니라 '경험 많은 기사가 실제로 선택한 경로를 예측하는 모델'을 만드는 것으로 설정했다. 아마존 사이언스 블로그는 이 설계의 배경을 분명히 밝혔다. 기사들은 어떤 도로가 다니기 어려운지, 어느 시간대에 교통이 막히는지, 어디에 주차하기 쉬운지를 몸으로 아는데, 순수 거리 최소화 알고리즘은 이런 암묵지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위권 팀들의 해법은 전통적인 외판원 문제 풀이 알고리즘을 머신러닝으로 대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사의 선택 패턴을 예측하는 머신러닝 모델과 전통적 최적화 알고리즘(LKH 솔버)을 단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순수 알고리즘이 사람의 현장 판단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진대회 자체가 증명한 셈이다.

유피에스의 오리온 운영 경험에서도 비슷한 긴장이 드러난다. 오리온이 제시하는 경로가 때로는 기사 눈에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회사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가령 길 건너편 집을 그날 건너뛰고 나중에 다시 오는 경로가 수학적으로는 전체 거리를 줄이지만, 기사 입장에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비효율로 느껴질 수 있다. 유피에스는 초기 현장 도입 과정에서 이런 괴리로 저항에 부딪혔고, 이후 기사가 알고리즘의 제안과 다르게 움직일 때 그 이유(교통 지연, 도로 공사 등)를 입력받아 다시 모델에 반영하는 피드백 구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라우팅 AI가 자리를 잡으려면 알고리즘의 정교함만큼이나, 현장의 암묵지를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체계가 함께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

택배·물류·유통업에서 배차와 경로 최적화는 비교적 검증된 기술 영역이라, 데이터(과거 배송 기록, 도로망, 차량 정보)가 정리돼 있다면 도입 자체의 난이도는 낮은 편이다. 다만 위 사례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것은 순수 거리·시간 최소화 모델을 그대로 들여오는 것만으로는 현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사와 배송 담당자의 경험을 데이터로 흡수하는 피드백 구조를 설계에 처음부터 포함시켜야, 숫자로는 최적이지만 현장에서는 신뢰받지 못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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