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회사·다사업부 조직의 AI 전환 — 계열사 데이터를 하나로 모으는 문제
지주회사 체제로 여러 사업부나 계열사를 거느린 조직에는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현장의 자율성을 지켜줄 것인가, 본사가 데이터와 의사결정을 묶어낼 것인가. AI가 등장하면서 이 질문은 다시 긴급해졌다. 거대언어모델이 쓸모 있으려면 각 사업부에 흩어진 데이터를 어느 수준까지는 같은 형식으로 모아야 하는데, 사업부마다 시스템과 용어, 심지어 '고객'이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나허(Danaher),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지멘스(Siemens) 세 회사가 이 질문에 내놓은 답은 서로 다르고, 그 차이가 지주회사형 조직이 AI를 들일 때 참고할 만한 지도가 된다.
다나허: 사업부 자율성은 지키되 데이터는 선택적으로 묶는다
다나허는 71,000명이 넘는 임직원과 200개가 넘는 사업부(operating company)를 '다나허 비즈니스 시스템(DBS)'이라는 공통 운영 원칙으로 느슨하게 묶어온 회사다. 데이터 분석 업체 돔(Domo)이 공개한 사례에 따르면, 다나허는 이미 수년 전부터 200개 넘는 사업부의 데이터를 하나의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끌어모으는 작업을 해왔다. 과거에는 이 통합이 대시보드와 알림 수준이었다면, 2026년 들어 다나허의 채용 공고에는 사업부를 가로질러 공통으로 쓸 수 있는 '피처 스토어(feature store)'를 구축하고, 진단 사업 부문의 영상·유전체·임상·보험청구 데이터를 사업부별 서버에 둔 채로 연결해 분석하는 분산형 방식으로 통합하는 역할이 등장한다. 실제 성과로 꼽을 만한 사례는 2026년 발표된 압캠(Abcam)의 자율 연구실이다. 다나허 산하의 사이티바(Cytiva), 벡맨 쿨터 라이프 사이언스(Beckman Coulter Life Sciences), 진데이터(Genedata), IDT, 몰레큘러 디바이스(Molecular Devices) 등 여러 사업부의 기술을 AI와 로봇공학으로 하나의 실험실 운영 체계에 묶은 것이다. 다나허의 신임 최고경영자 줄리 소이어 몽고메리는 2026년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사업부별 고객 밀착성과 책임 소재는 그대로 지키면서,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전사 단위 기회에만 본사가 투자를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데이터를 중앙화하는 대신, 통합할 가치가 있는 지점만 골라 묶는 셈이다.
버크셔 해서웨이: 데이터를 굳이 묶지 않는 선택
반대편 끝에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있다. 회사의 공시 자료는 자사 사업부들이 '매우 분권적으로 운영되며 중앙화되거나 통합된 경영 기능이 거의 없다'고 명시한다. 2026년 5월 연례 주주총회에서 보험 부문 부회장 아지트 자인은 AI가 복잡한 보험 가격 책정이나 보험금 지급 판단까지 넘겨받으려면 "앞으로도 수년이 걸릴 것"이라며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고, 최고경영자 그레그 에이블도 AI 자체를 위한 투자는 하지 않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재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버크셔 안에서 AI의 효과가 비교적 분명하게 거론되는 곳은 철도 자회사 BNSF처럼 단일 사업부 내부에서 컴퓨팅과 데이터를 모아 운영을 개선하는 영역이다. 즉 버크셔는 사업부 간 데이터를 가로질러 묶는 투자를 하지 않고도, 각 사업부가 자기 내부에서 AI를 쓰는 것은 막지 않는 모델을 택했다. 모든 복합기업이 전사 통합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조 사례다.
지멘스: 지식그래프로 사업부 전체를 하나의 플랫폼에 올린다
지멘스는 가장 적극적으로 통합을 선택한 쪽이다. 2026년 6월 '리얼라이즈 라이브' 행사에서 공개한 '인텔리전스 센터 X(Intelligence Center X)'는 기업 데이터와 산업별 온톨로지, 지멘스의 지식그래프 기능을 하나의 통제된 환경에 결합한 에이전틱 AI 플랫폼이다. 랩마이너(RapidMiner) 인수로 얻은 AI 역량과 로우코드 플랫폼 멘딕스(Mendix)까지 이 플랫폼 안으로 통합됐고, 스노우플레이크(Snowflake)의 데이터 환경과 코텍스(Cortex) AI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고 회사는 설명한다. 생명과학 소프트웨어 업체 닷매틱스(Dotmatics) 인수로 확보한 연구 데이터도 이 플랫폼을 통해 산업용 AI에 공급되는 구조다. 다나허가 사업부별로 선택적인 통합을 하고 버크셔가 통합을 거의 하지 않는다면, 지멘스는 전사 공통의 데이터·지식 계층을 먼저 깔고 그 위에서 사업부들이 AI를 쓰게 하는 쪽에 가깝다.
재무적으로 무엇이 움직이나, 그리고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
세 모델의 차이는 결국 손익계산서의 다른 항목을 움직인다. 지멘스식 전사 플랫폼은 중복되던 사업부별 데이터 인프라 투자를 공통 비용으로 치환해 판관비 구조를 바꿀 여지가 있고, 압캠처럼 여러 사업부의 기술을 하나로 묶은 제품은 매출원가 개선보다는 신제품 매출·고객당 판매가(ASP) 상승 쪽에서 가치를 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버크셔처럼 통합을 안 하는 선택은 그 자체로 비용을 아낀다. 전사 데이터 플랫폼 구축에는 상당한 초기 투자와 긴 회수 기간이 따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아직 공개 재무제표에서 항목 단위로 증명된 효과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추정되는 경로일 뿐이다. 세 회사 중 누구도 "사업부 간 데이터 통합으로 판관비를 몇 퍼센트 줄였다"는 식의 감사된 수치를 공시하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장애물은 컨설팅업체 페르타마 파트너스(Pertama Partners)가 지적하는 문제다. 사업부마다 '고객'이나 '매출 인식' 같은 기본 지표의 정의부터 다른 경우가 많아서, 데이터를 억지로 한곳에 모아도 그 위에서 돌린 AI의 결론이 사업부 단위에서는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나허가 사업부 자율성과 책임 소재를 지키겠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중앙화된 AI가 내린 판단이 현장 책임자의 권한을 흐리면, 데이터는 깨끗해졌는데 의사결정 구조는 오히려 혼란스러워지는 역설이 생긴다.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
한국의 많은 대기업집단은 지주회사 체제 아래 수십 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고, 계열사마다 전산 시스템과 운영 방식이 제각각인 경우가 흔하다. 이 구조는 다나허·버크셔·지멘스가 보여준 선택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에 부딪힌다. 모든 계열사의 데이터를 하나의 틀에 올릴 것인가, 핵심 몇 곳만 선택적으로 통합할 것인가, 아니면 계열사별 자율을 유지한 채 각자 AI를 들이게 할 것인가. 정답은 업종과 계열사 간 사업 연관성에 따라 달라지지만, 세 회사의 사례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통합의 범위를 정하기 전에 먼저 계열사마다 같은 용어를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기초 작업 없이 데이터만 먼저 모으면, 지멘스가 설계한 수준의 플랫폼을 들여놓아도 숫자는 모였지만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