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지속가능경영 보고의 AI 전환 — 비재무 공시 부담은 실제로 줄어드는가
유럽연합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이 요구하는 공시 항목은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 전체를 기준으로 1,000개가 넘는다. 여기에 공급망 데이터, 외부 검증, 전년 대비 비교까지 얹으면 담당 부서가 매년 몇 달을 꼬박 이 작업에만 쓰는 구조가 된다. 재무 공시는 회계팀이 수십 년째 다뤄온 익숙한 업무지만, 비재무 공시는 부서마다 흩어진 데이터를 끌어모아 처음 보는 기준에 맞춰 재배열하는 작업이라 반복 노동의 비중이 유난히 크다. 그래서 생성형 AI가 가장 먼저 투입된 자리도 '찾고 정리하는' 단계다.
격차분석과 초안 작성은 이미 시간을 줄이고 있다
컨설팅사 에키메트릭스(Ekimetrics)가 공개한 사례에서는 생활용품 분야의 한 글로벌 기업(업체명은 비공개)이 '셀시우스(Celsius) ESG 코파일럿'을 활용해 20개에 이르는 내부 보고서의 데이터를 ESRS의 1,200개 넘는 공시 항목에 매핑했다. 회사 측은 이 작업을 통해 공시 항목별 데이터 격차를 찾아내는 기간이 약 6개월에서 6주로 줄었다고 밝혔다. 데이터 분석기업 트렌던스(Tredence)도 소비재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례에서, 전사적 자원관리(ERP) 전환과 함께 보고 프로세스를 자동화해 처리 시간을 최대 75퍼센트 줄이고 수작업 투입 인력을 30명 넘게 줄였다고 전했다(두 사례 모두 수치는 컨설팅사 자체 집계다).
플랫폼 쪽에서는 경쟁이 뚜렷하다. 기후·ESG 데이터 플랫폼 워터셰드(Watershed)는 CSRD·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용 보고서를 AI가 동료 기업 데이터를 참고해 자동으로 초안을 작성하는 기능을 내놓았고, 2024년 포레스터 웨이브(Forrester Wave) 평가에서 스윕(Sweep)·페르세포니(Persefoni)·마이크로소프트·워키바(Workiva)를 제치고 현재 제품력 부문 최고 점수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PwC가 SAP의 AI 코어와 하나(HANA) 클라우드 벡터 엔진을 기반으로 'CSRD.AI 매니저'를 선보여 2025년 SAP 이노베이션 어워드를 받았다. 이 제품은 데이터 수집과 핵심성과지표(KPI) 계산, 보고서 초안 생성까지 자동화한다고 설명하지만, 정량적인 절감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수천 개 항목 중 무엇이 빠졌는지 찾아내고 초안을 채우는' 영역은 상당히 성숙한 자동화 대상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공시 요구 자체가 줄고 있다
여기서 이 주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가 끼어든다. 유럽연합은 2025년 '스톱 더 클록(Stop-the-Clock)' 지침으로 후순위 적용 대상 기업의 CSRD 시행 시점을 2년 미뤘고, 2025년 12월에는 이른바 '오므니버스 I' 패키지를 통해 공시 의무 적용 대상을 직원 수 1,000명·매출 4억 5,000만 유로 이상 기업으로 좁히는 방향으로 입법을 진행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 패키지를 추진한 명시적 목표 하나가 기업과 금융기관의 지속가능성 보고 부담을 25퍼센트 줄이는 것이다. 즉 한쪽에서는 AI가 공시 작업 시간을 단축하고 있는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그 작업 자체가 애초에 필요 없어지는 기업이 늘고 있는 셈이다.
이 둘을 같이 놓으면 질문이 바뀐다. "AI가 ESG 보고 부담을 줄이는가"가 아니라 "줄어드는 보고 부담 앞에서 AI 도구에 들인 투자는 회수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CSRD 적용 대상에서 빠지는 중견기업이라면 격차분석 플랫폼을 도입할 명분이 약해지고, 여전히 대상에 남는 대기업이라면 공시 항목 수는 줄어도 외부 검증(어슈어런스)에 견딜 만한 근거 추적은 그대로 요구된다. 2026년 업계 실무자들 사이에서 나온 지적도 이 지점을 겨냥한다. AI가 초안을 빠르게 만들어줘도 사실 확인, 표현 검토, 최종 서명은 결국 담당자가 해야 하고, 출처가 부실한 공급망 데이터나 모델의 환각(hallucination)이 그대로 보고서에 실릴 위험은 자동화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
한국에서는 금융위원회가 2026년 중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공시 로드맵을 가다듬어 2028년부터 단계적 의무화에 들어가는 방향을 예고한 것으로 알려졌다(세부 적용 시점과 대상 범위는 자료마다 기술이 다소 엇갈려 최종 확정안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험이 주는 시사점은 두 가지다. 첫째, 공시 항목을 찾고 채우는 작업은 기술적으로 이미 자동화가 가능한 수준에 와 있으므로, 의무화 일정이 다가올수록 데이터를 어디서 모아 어떻게 매핑할지부터 미리 정리해두는 쪽이 유리하다. 둘째, 규제의 적용 범위와 요구 수준은 한국에서도 시행 전까지 계속 조정될 가능성이 크므로, 공시 도구에 대한 투자 결정을 지금의 초안이 아니라 확정된 범위에 맞춰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편이 안전하다. 서둘러 큰 시스템을 들였다가 적용 대상에서 빠지는 것보다, 데이터를 정리해두고 규제가 확정되는 시점에 맞춰 움직이는 쪽이 투자 대비 효과가 낫다.
참고한 자료
- Ekimetrics — Using generative AI to identify CSRD data gaps and accelerate compliance
- Tredence — ESG Reporting Optimization & CSRD Readiness
- SAP News — How AI is Helping PwC Clients Comply with European Union Sustainability Regulations
- Dechert — Simplification in action: EU CSRD and CSDDD after the Omnibus I Directive
- Watershed — AI-powered ESG repor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