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리스크관리(트레저리)의 AI 전환 — 외환·유동성 관리에서 무엇이 달라지나
기업의 트레저리(자금·외환 관리 조직)는 화려한 부서가 아니다. 하지만 환율이 급변하거나 유동성이 막히면 가장 먼저 회사를 흔드는 곳이다. PwC가 2025년 발표한 글로벌 트레저리 서베이에서 응답자의 83%가 외환(FX) 리스크를 가장 부담스러운 위험 요인으로 꼽았고, 금리 리스크가 72%로 뒤를 이었다. 같은 조사에서 장기 현금 예측의 31%, 단기 현금 예측의 22%가 여전히 오프라인 문서나 사내에서 직접 만든 도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재무전문가협회(AFP)가 2026년 5월 트레저리 실무자 42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6 트레저리 벤치마킹 서베이'에서도 현금·유동성 예측이 가장 어려운 업무로 꼽혔다(49%). 몇 년째 같은 업무가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데이터가 흩어져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
현금 예측과 외환 노출 관리가 어려운 이유는 복잡한 수학이 아니라 데이터의 위치에 있다. 다국적 기업일수록 현금 유출입은 각국 법인의 매출·매입·급여 시스템에 흩어져 있고, 환노출은 수백 개 거래 단위로 쪼개져 발생한다. 이를 하나의 그림으로 모으는 작업 자체가 트레저리의 오래된 병목이었다. 컨설팅사 언스트앤드영(EY)은 2026년 9월 인도 지사 보고서에서, 스프레드시트 중심으로 운영되는 트레저리 조직의 예측 오차가 20%를 넘는 경우가 흔하다고 밝혔다. EY는 에이전틱 AI(스스로 데이터를 모으고 판단하는 AI)를 적용하면 30·60·90일 구간 예측 정확도를 최대 9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망했는데, 이는 EY 자체 분석치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검증된 사례 — ASML의 오픈소스 예측 모델
반도체 장비회사 ASML(에이에스엠엘)의 트레저리팀은 벤더 제품이 아니라 자체 모델로 성과를 낸 드문 사례다. ASML은 미국 공급업체에서 부품을 달러로 구매하고 장비는 유로로 판매해 유로-달러 환노출이 크다. 트레저리팀은 데이터 과학팀과 함께 5년치 달러 유입 실적을 모아 20개의 무료 오픈소스 파이썬 알고리즘을 시험했고, 가장 성능이 좋은 모델로 완전 자동화된 예측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재무전문가협회(AFP)가 이 사례를 2024년 피너클 어워드(Pinnacle Awards) 케이스 스터디로 소개했는데, 예측 정확도가 기존 70%에서 96%로 올라갔고 달러 노출액을 월 2,500만~5,000만 달러 줄이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같은 프로젝트는 그해 네덜란드 트레저리협회(DACT)의 트레저리상도 받았다. 다만 이 수치는 ASML과 시상 기관이 공개한 자료로, 외부의 독립적인 재현 검증을 거친 것은 아니다. 이 사례가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출발점은 값비싼 솔루션이 아니라 과거 실적 데이터를 길게 모으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기초 작업이었다.
은행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인프라
변화는 기업 트레저리 바깥, 은행 인프라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앤트 그룹(Ant Group) 계열의 앤트 인터내셔널(Ant International)은 자사의 현금흐름·외환 노출을 시간·일·주 단위로 예측하려고 시계열 모델 '팰컨티에스티(FalconTST)'를 개발해 내부에 먼저 적용했고, 이후 이를 은행에 공급하는 사업으로 확장했다. 바클리스(Barclays)는 2025년 5월 이 모델을 자사 외환 헤지 플랫폼 '바크스 넷에프엑스(BARX NetFX)'에 결합해 고객사의 외환 노출을 더 정밀하게 예측하고 헤지 조건을 제시하는 데 쓰고 있다. 2026년 공개된 모델 2.0 버전은 씨티(Citi), 도이치방크(Deutsche Bank), 스탠다드차타드(Standard Chartered)도 각자의 외환 플랫폼에 결합해 도입했다. 앤트 인터내셔널 측은 이 모델이 93% 이상의 예측 정확도를 꾸준히 내고 있고, 정밀한 예측이 외환 헤지·배분 비용을 6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수치 역시 공급사 자체 발표로, 독립 검증 결과는 아니다. 중요한 점은 트레저리의 AI 전환이 기업의 자체 구축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래 은행의 외환·헤지 시스템이 AI 기반으로 재편되면, 기업 트레저리는 별다른 투자 없이도 더 정밀한 헤지 조건을 제시받게 된다.
투자 의지는 큰데 실제 도입은 왜 느린가
자금조달전문가재단(EuroFinance)과 기업금융 소프트웨어 업체 TIS의 공동 조사에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지멘스 에너지(Siemens Energy)의 트레저리 리더가 참여했는데, 응답자의 38%가 현금흐름 예측을 AI에 가장 적합한 활용 분야로 꼽았다. 하지만 같은 조사는 트레저리 리더들이 AI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실제 도입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고 정리했다. 트레저리가 다루는 숫자는 회사의 지급 능력과 직결되는 만큼, 모델이 틀렸을 때의 대가가 다른 부서보다 크다는 점이 조심스러운 태도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AFP 조사에서도 AI에 대한 관심은 해마다 커지는데 현금 예측이라는 핵심 업무의 체감 난이도는 몇 년째 비슷한 수준으로 남아 있다. 관심과 실행 사이의 간극이 이 영역에서 특히 뚜렷하다.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
한국의 수출 중심 중견·대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러 해외 법인과 통화로 흩어진 매출·매입 데이터를 모아 유동성과 환노출을 한 번에 들여다보는 구조를 갖춘 곳은 많지 않다. ASML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의 출발점은 값비싼 AI 솔루션이 아니라 과거 실적 데이터를 길게 모으고 정리하는 기초 작업이다. 동시에 거래 은행이 외환·헤지 인프라를 AI 기반으로 바꾸는 흐름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트레저리팀이 직접 모델을 만들지 않아도 거래 은행을 통해 더 정밀한 헤지 조건을 받을 길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델이 틀렸을 때의 대가가 큰 영역인 만큼, 검증되지 않은 벤더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작은 범위에서 먼저 정확도를 확인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참고한 자료
- AFP — 2026 Treasury Benchmarking Survey
- AFP — An In-House AI Solution to Improve FX Exposure Forecasting Accuracy (ASML case study)
- Treasury Today — ASML Improves Forecasting with Open Source AI
- FinTech Futures — Major banks tap Ant International's forecasting platform FalconTST 2.0
- AccessWire — TIS, EuroFinance Study Finds Corporate Treasurers Actively Evaluating AI, But Hesitant to Adopt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