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과 AI 도입 협상 — 해외 기업들은 자동화 범위를 어떻게 합의했나
경영진이 AI 도입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조직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노동조합이 있는 산업에서는 자동화의 범위, 속도, 적용 대상이 단체교섭의 의제가 된다. 2023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몇 건의 주목할 만한 합의가 나왔고, 그 조항들을 비교해보면 노사 양쪽이 각각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지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할리우드가 먼저 그은 선
2023년 작가조합(WGA)과 영화·방송 제작자연합(AMPTP)이 148일간의 파업 끝에 맺은 단체협약은 AI를 다룬 초기 사례 중 가장 많이 인용된다. 핵심은 세 가지다. AI는 신용(credit)이 인정되는 집필이나 수정 작업을 할 수 없고, AI가 생성한 결과물은 원작(source material)으로 취급되지 않으며, 작가가 원한다면 AI 도구를 참고용으로 쓸 수는 있지만 제작사가 이를 강제할 수는 없다. 법률자문사 DLA파이퍼(DLA Piper)의 분석에 따르면 양측은 AI 관련 법적 쟁점이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남은 권리는 유보한 채 최소 반년에 한 번씩 만나 AI 활용 현황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결론을 못 박기보다 정기 재검토 창구를 열어둔 셈이다.
같은 해 말 타결된 배우조합(SAG-AFTRA) 협약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배우의 디지털 복제물(digital replica) 사용을 두 범주로 나눠, 촬영 현장에서 본인이 직접 참여해 만든 복제물은 제작과 사용 각각에 대해 별도의 명시적 동의와 보상을 요구하고, 기존 자료만으로 독립적으로 만든 복제물은 보상 조건을 자유 협상에 맡긴다. 동의는 원칙적으로 본인 사후에도 유지된다. 두 조합 모두 'AI를 쓰지 말라'가 아니라 'AI를 어떻게, 누구의 동의 아래, 어떤 보상으로 쓸지'를 규정하는 쪽을 택했다.
항만과 독일의 접근 — 동의보다 구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창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다퉜다면, 2024~2025년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와 미국해운동맹(USMX) 간 협상은 물리적 자동화 자체를 다뤘다. 동부·걸프만 14개 항만의 약 2만 5,000명을 대상으로 한 6년짜리 기본협약에서 양측은 완전 자동화는 배제하되 반자동화 장비(예: 반자동 레일식 갠트리 크레인)는 허용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노조가 얻은 대가는 모호한 고용 유지 약속이 아니라 '새 장비가 들어올 때마다 그 장비에 직접 연계된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구체적 조항이었고, 향후 기술 도입 결정은 노사 동수로 구성된 기술위원회가 심의하기로 했다.
독일은 개별 협상이 아니라 법 구조로 접근한다. 사업장조직법(BetrVG) 제87조 1항 6호는 직원의 행동이나 성과를 감시하는 기술 시스템 도입에 대해 사업장평의회(Betriebsrat)에 공동결정권을 부여하는데, 법률자문사 CHRO 가이드가 지적하듯 이는 단순 협의가 아니라 사실상의 거부권에 가깝다. 다만 그 적용 범위는 사건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2024년 함부르크 노동법원은 특정 생성형 AI 도구가 회사 기기에 설치되지 않고 직원이 개인 계정으로 썼다는 이유로 평의회 권리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법률자문사 오릭(Orrick) 정리). 조문은 포괄적이지만 실제 판례는 도구의 설치 위치, 데이터 흐름 같은 세부 사실에 따라 갈린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네 가지 조항, 그리고 그 비용
산업 전반으로 넓혀 보면 패턴이 보인다. 업계 분석매체 메타인트로(MetaIntro)가 인용한 AI익스포저(AIExposure)의 분석(2023~2026년 3월 체결된 47건 집계, 1차 자료로 직접 확인되지는 않아 수치는 참고 수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에 따르면 신규 AI 도입 전 사전통지 조항이 포함된 비중이 89퍼센트, 재교육 권리가 76퍼센트, AI 결정에 대한 인간의 검토·개입권이 72퍼센트였다고 한다. 앞서 본 사례들과 맞춰보면 결국 노조 쪽이 반복해서 얻어내는 것은 네 가지로 좁혀진다. 사전통지, 재교육, 인간 재검토권, 그리고 ILA 사례처럼 신기술과 직접 연계된 고용 보장이다. 반대로 경영 쪽이 끝까지 지키려 하는 것은 '무엇을 도입할지'에 대한 결정권 자체다.
이 구조를 재무적으로 보면, 협상으로 얻어진 조항들은 자동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비용 절감 경로에 일종의 마찰을 추가한다. 사전통지와 재교육 기간은 도입 속도를 늦추고, 장비 연계 고용보장은 인건비 절감 폭을 제한하며, 공동 기술위원회 같은 거버넌스 장치는 의사결정 비용을 늘린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손실로만 볼 수는 없다. 자동화를 둘러싼 분쟁과 파업이 만드는 운영 리스크, 즉 항만이 멈추거나 제작이 중단되는 상황의 기대비용과 비교하면, 명확한 규칙과 합의된 절차는 오히려 변화를 더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중장기적으로는 실행 리스크를 낮추는 쪽에 가깝다. 결국 이런 조항들은 자동화를 막는 장치라기보다, 자동화가 조직 안에서 소화되는 속도와 순서를 노사가 함께 설계하는 장치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계와 한국에 주는 시사점
이 사례들의 한계도 분명하다. 지금까지 구체적 조항이 쌓인 산업은 엔터테인먼트와 항만처럼 조합 조직률이 높고 교섭력이 센 소수 업종에 국한된다. 사무직·지식노동 전반에서는 이런 협상 창구 자체가 드물어서, AI 도입 방식과 속도를 사실상 사용자가 단독으로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일식 공동결정권도 조문은 넓지만 판례가 아직 축적 중이라 실제 적용 범위는 계속 다퉈지고 있다.
한국은 사업장 단위 기업별 노조 체제가 중심이고, 항만노조-선사연합처럼 업종 전체를 아우르는 기술위원회 구조는 아직 사례를 찾기 어렵다. 현대차 노사가 최근 국내에서 맺은 합의는 자동화 도입 시 노사가 논의한다는 수준에 머물렀고, 장비와 직접 연계된 고용 보장이나 노사 동수의 상설 심의기구 같은 해외 사례의 구조적 장치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에서 AI·자동화의 도입 범위가 당분간 개별 사업장의 교섭력과 경영 판단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업종 단위의 표준화된 협상 틀이 자리 잡을지는 앞으로 몇 차례의 개별 교섭 결과가 쌓여야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한 자료
- Inside the WGA and AMPTP 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 — DLA Piper
- Generative AI, Movies and TV: How the 2023 SAG-AFTRA and WGA Contracts Address Generative AI — Perkins Coie
- ILA, USMX reach contract agreement on automation, avoiding port strike — FreightWaves
- Works Council Rights in AI Implementation Projects — Covington
- AI and German Co-Determination – What Employers Need to Know — Orrick
- Hyundai union settles quickly, conceding ground on AI — Automotiv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