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구매 부서의 AI 전환 — 발주와 재고 관리에서 먼저 나타나는 변화
프록터앤갬블(P&G)은 2026년 실적 발표에서 '공급망 3.0(Supply Chain 3.0)' 전환 계획을 대규모 적용 단계로 넘긴다고 밝혔다. 목표는 2030년까지 매출원가 기준 최대 15억 달러(약 2조 1,000억원)의 연간 생산성 절감이다. 여기에는 물류센터와 공장의 계획·운영 자동화, 트럭 배차의 동적 경로 최적화, 소싱 물량 배분의 AI 기반 조정이 포함된다. 다만 회사 스스로도 이 전환이 순수한 AI 프로젝트가 아니라 AI와 기존 자동화 기술이 섞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P&G는 비제조 부문 조직을 슬림화하는 개편을 2년에 걸쳐 병행하고 있는데, 이는 2026회계연도에 예상되는 약 5억 달러(약 7,000억원) 규모의 관세 부담을 상쇄하는 재원으로도 쓰인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목표 금액이 공개됐다는 점 자체보다, 어느 영역에서 AI가 먼저 들어가고 어디는 아직 사람의 판단에 남아 있는지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왜 발주와 재고 관리부터 움직이는가
조달·공급망 업무는 성격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발주량 산정, 재고 배분, 배송 경로 조정처럼 과거 판매 데이터와 리드타임, 재고 회전율 같은 정형 데이터를 근거로 반복되는 의사결정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공급업체와 몇 년짜리 계약을 맺을지, 가격 협상을 어떻게 끌고 갈지, 지정학적 리스크가 있는 지역의 소싱 비중을 얼마나 줄일지 같은 전략적 판단이다. AI가 먼저 파고드는 곳은 전자다. 이유는 단순하다. 발주와 재고 데이터는 이미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안에 정형화돼 쌓여 있고, 정답에 해당하는 '적정 재고 수준'을 과거 데이터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니레버(Unilever)가 구글의 제미나이 엔터프라이즈(Gemini Enterprise) 플랫폼 위에 구축한 다중 에이전트 조달 시스템도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소싱 데이터, 가격 이력, 계약 조건, 지속가능성 리스크를 각각 검토하는 개별 에이전트가 있고, 그 결과를 종합해 담당자에게 하나의 화면으로 보여주는 조정 에이전트가 그 위에 있다. 회사에 따르면 이 구조로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최종 소싱 결정과 공급업체와의 협상 자체는 여전히 사람이 내린다. 유니레버 아이스크림 사업부는 공장 35곳과 냉동고 약 300만 대를 60개국에서 운영하는데, 여기서 AI가 하는 일은 날씨 데이터와 조달 데이터를 결합해 수요 예측을 조정하고 폐기 손실을 줄이는 쪽이지, 어느 원료 공급업체와 거래할지를 대신 정하는 쪽이 아니다.
월마트(Walmart)의 경우도 비슷하다. 미국 이커머스 물류센터 물량의 절반이 자동화됐고 매장의 60퍼센트가 자동화된 배송을 받고 있지만, 회사가 공개한 수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재고 증가율이 매출 성장률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는 점이다. 매출은 늘어나는데 재고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는 발주와 보충 주기를 더 정밀하게 맞췄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결과다. 회사 경영진은 공급망 자동화에 대한 설비투자가 향후 2년 안에 정점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이 영역의 투자가 아직 확장 국면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숫자로 보면 무엇이 움직이나
컨설팅사 맥킨지(McKinsey)가 유통·물류 부문의 AI 도입 사례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재고 비용은 20~30퍼센트, 물류비는 5~20퍼센트, 조달 지출은 5~15퍼센트 범위에서 개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요 예측 오차율도 통계 기반 모델 대비 상당 폭 줄어든다는 분석이 여러 사례를 종합해 나온다. 다만 이런 수치는 어디까지나 개선 '여지'를 추정한 범위이지, 모든 기업이 실제로 달성한 실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도입 현황을 보면 이 격차가 더 뚜렷하다. 컨설팅사 해켓그룹(Hackett Group)이 2026년 3월 발표한 조사에서는 조달 조직의 43퍼센트가 AI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실제로 대규모로 전면 적용했다고 답한 곳은 12퍼센트에 그쳤다. 나머지 대다수는 여전히 파일럿이나 단일 업무 단위의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다. P&G가 내건 15억 달러라는 목표치도 2030년까지의 누적 목표이지 이미 실현된 절감액이 아니다. 지금 공개되는 숫자 대부분은 '얼마나 줄었다'가 아니라 '얼마나 줄이겠다'는 계획에 더 가깝다.
한계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
발주와 재고라는 정형 영역에서 성과가 먼저 나온다고 해서, 조달 조직 전체가 곧바로 AI로 재편되는 것은 아니다. 공급업체와의 관계 관리, 장기 계약 협상, 공급망 다변화 같은 전략적 판단은 여전히 정성적 요소가 많고 검증 가능한 정답이 없어서 자동화 속도가 더디다. P&G 사례에서도 보이듯, 이런 대규모 전환은 데이터 정합성, 공급업체의 협조 수준, 현장 인력의 적응 속도에 따라 계획한 절감액이 실제 손익에 반영되는 시점이 크게 밀릴 수 있다. 또한 관세나 원자재 가격 변동 같은 외부 요인이 같은 시기에 겹치면, 어디까지가 AI 도입에 따른 순수한 생산성 개선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비용 절감 조치의 효과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해켓그룹 조사가 보여주는 도입률과 실행률의 큰 격차는, 이 영역의 AI 전환이 아직 소수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 사례와 다수 기업의 초기 실험 사이에서 벌어져 있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한국의 제조·유통 기업에 주는 시사점은 순서에 있다. 발주량 산정과 재고 배분처럼 과거 데이터가 이미 쌓여 있고 정답 검증이 가능한 영역부터 좁혀서 시작하고, 공급업체 선정이나 계약 협상처럼 관계와 판단이 얽힌 영역은 그다음 단계로 미루는 편이 리스크가 적다. 무엇보다 SKU별 판매 이력, 리드타임, 재고 회전율 데이터가 정리돼 있지 않으면 이 영역에서도 AI 도입은 출발선에 서지 못한다는 점을 P&G와 월마트 사례가 함께 보여준다.
참고한 자료
- P&G Unveils Supply Chain 3.0 to Drive $1.5B In Savings (Supplychain360)
- P&G shifts Supply Chain 3.0, other platforms into large-scale rollout (Supply Chain Dive)
- Agentic AI in Procurement: Gartner, Bain, Unilever & Revolut (Procurement Magazine)
- 4 ways Walmart is scaling AI to unify its supply chain (Supply Chain Dive)
- Why 2026 Is the Year of AI Agents for Autonomous Procurement (SupplyChainB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