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전략의 종말 — AI 시대의 전략은 문서가 아니라 상시 시스템이다
많은 기업이 여전히 3분기 즈음 다음 해 전략 문서를 만든다. 시장 분석, 경쟁사 동향, 재무 목표를 몇 달에 걸쳐 취합하고, 임원 워크숍을 거쳐, 이사회에 보고한 뒤 1년간 그 문서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문제는 그 문서가 완성되는 시점에 이미 전제가 틀어져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정보 수집이 병목이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26년 보고서 "The Corporate Strategy Function in an AI-First World"에서 이 구조를 정면으로 짚는다. 전략 수립이 연 단위로 이뤄지는 이유는 전략에 필요한 정보 수집 자체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현업 부서의 업무를 방해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앙에서 전략이 완성될 때쯤이면 현장의 상황은 이미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다. BCG는 생성형 AI가 이 시차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다고 본다. 정보 수집이 더는 몇 달짜리 프로젝트가 아니라 상시로 돌아가는 배경 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보고서가 드는 사례가 로레알(L'Oréal)의 트렌드스포터(TrendSpotter)다. 로레알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 도구는 3,500개 이상의 온라인 소스 — 소셜미디어, 뷰티 블로그, 학술 자료 — 를 상시로 분석해 뷰티 트렌드를 실제 유행보다 6개월에서 18개월 앞서 감지한다. 지금까지 700~800개의 트렌드를 포착했다고 회사 측은 밝히고 있다. 연 1회 시장조사 보고서를 기다리는 대신, 트렌드 감지 자체를 상시 가동되는 파이프라인으로 바꾼 것이다. BCG는 이런 상시 모니터링 도구의 다른 예로 시그널에이아이(Signal AI) 같은 서비스도 언급한다. 이 회사는 경쟁사 공시, 시장 뉴스, 소셜미디어를 실시간으로 훑어 위험 신호와 경쟁 동향을 감지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전례는 AI 이전에도 있었다
사실 "연 단위 계획을 버린다"는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스웨덴 은행 한델스방켄(Handelsbanken)은 1970년대부터 예산 편성 자체를 하지 않는 경영 방식을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점별 성과는 자기자본이익률·비용대비수익비율 같은 비교 지표로 관리하고, 연초에 정해놓은 목표 대비 달성률로 평가하지 않는다. 포브스(Forbes)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이 은행은 1972년 이래 매년 경쟁 은행 평균을 웃도는 성과를 냈고 금융위기 때도 구제금융을 받지 않았다.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 기업 에퀴노르(Equinor, 옛 스타토일)도 2005년부터 비슷한 길을 걸었다.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인 설비투자를 고정된 연간 예산으로 미리 확정하지 않고, 사업부가 연중 아무 때나 프로젝트 승인을 요청하면 전략적 타당성과 재무 여력을 그때그때 심사해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비욘드 버지팅(Beyond Budgeting)" 운동이 20년 넘게 주장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예산과 전략을 연 1회 확정하는 의식(ritual)에서 상시 판단 체계로 옮기라는 것.
이 사례들이 중요한 이유는 AI 없이도 상시 전략 운영이 가능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은 이런 방식을 도입할 조직적 역량과 데이터 인프라를 갖춘 기업이 소수였다. AI가 바꾸는 것은 그 진입장벽이다.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이상 신호를 잡아내는 작업을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지 않아도 되면서, 상시 전략 운영이 대기업 몇 곳만의 예외적 실험이 아니라 표준적으로 시도해볼 만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
무엇이 실제로 바뀌는가
맥킨지(McKinsey)는 2026년 조직 실태 보고서에서 이런 흐름을 "비즈니스 애즈 체인지(business as change)"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전환(transformation)이 끝나는 지점이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의 상시적인 운영 상태 자체가 됐다는 뜻이다. 같은 보고서는 상위 성과 기업들이 데이터·AI 모델·의사결정 체계를 하나로 묶은 "인텔리전스 레이어"를 조직의 통제판처럼 운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품·플랫폼 조직 구조를 갖춘 기업에서는 의사결정이 몇 개월이 아니라 며칠 단위로 이뤄지고, 부서 간 인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이 줄어드는 대신 정보 흐름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재무 계획 영역에서도 같은 방향의 변화가 관찰된다. 연 1회 확정하는 예산 대신 매 분기 또는 매월 4~6분기를 내다보며 갱신하는 롤링 포캐스트(rolling forecast) 방식이 AI 기반 재무계획(FP&A) 도구와 결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실제 값이 들어올 때마다 AI가 가정이 더는 성립하지 않는 항목을 표시하고 중간 조정을 제안하는 식이다. 업계 조사에서는 이런 방식을 도입한 기업의 예산 편성 주기가 기존 대비 30~40퍼센트가량 짧아졌다는 결과도 나온다. 다만 이는 도구를 제공하는 업계 쪽 자료여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방향성 지표로 보는 편이 맞다.
한계와 미지수
상시 전략 시스템이 연간 계획보다 항상 우월한 것은 아니다. 첫째, 데이터가 많아진다고 판단의 질이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롤링 포캐스트 도구를 쓰더라도 예산 편성 관행 자체가 부실하면 AI는 그 부실함을 더 빠르게 반복해서 노출시킬 뿐이라는 지적이 실무 컨설턴트들 사이에서 나온다. 둘째, 상시 모니터링은 조직을 단기 신호에 과민 반응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몇 달에 한 번 숙고해서 내릴 결정을 매일 들어오는 신호에 따라 뒤집으면 오히려 전략의 일관성이 무너진다. 셋째, 한델스방켄이나 에퀴노르의 사례는 조직 문화와 평가 체계 전반을 함께 바꿔야 작동한 것이지, AI 도구 하나를 얹는다고 재현되는 결과가 아니다. 상시 정보 흐름을 만드는 것과 그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 권한을 이양하는 것은 별개의 과제다.
한국 기업 상당수는 아직 연 1회 전략기획 보고서와 연 1회 예산 편성이라는 리듬으로 움직인다. 대기업의 경우 이 리듬을 완전히 상시 체계로 바꾸는 것은 지배구조·평가 체계까지 건드리는 큰 결정이다. 하지만 중견·중소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경쟁사 동향이나 시장 신호를 상시로 모으는 정도는 조직 개편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축적된 정보가 다음 연간 전략 회의의 재료를 훨씬 두텁게 만들어준다. 완전한 전환이 아니라도, 문서 한 번으로 끝나던 전략의 정보 기반을 상시로 갱신하는 습관부터 들이는 것이 현실적인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