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AI 롤업이 가능한 산업은 어디인가 — 판단 기준 네 가지
미국에서 회계법인·법률사무소·홈서비스업체·보험 대리점을 사 모으는 투자자들은 아무 업종이나 고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 — 회계·세무 법인, 법률 서비스, 관리형 IT 서비스(MSP), 홈서비스, 부동산·입주자 관리, 보험 브로커리지, 의료·치과 청구 대행 — 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조건이 되풀이된다. 이 조건을 기준 삼아 한국에 적용하면 어떤 산업이 후보군에 들어오는지 가늠할 수 있다.
판단 기준 네 가지
첫째, 소유 구조가 극도로 파편화돼 있어야 한다. 개별 업체는 대표 한 명이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이고, 전국에 흩어진 업체 수는 많지만 시장을 지배하는 대형 플레이어는 없는 상태다. 파편화된 시장이라야 낮은 배수로 여러 업체를 사서 하나로 묶었을 때 규모의 경제와 재평가된 배수(멀티플)라는 두 가지 이익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둘째, 매출 구조가 반복적이고 경기에 크게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필수적이거나 규제로 보장된 수요(보험 갱신, 세무 신고, 요양 서비스, 배관·전기 같은 필수 수리)는 경기 하강기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모 자금이 선호하는 것은 성장성보다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이다.
셋째, 이면 업무 대부분이 반복적인 사무 처리다. 견적, 예약, 청구, 문서 확인, 고객 응대처럼 정형화된 업무 비중이 클수록 에이전트로 재설계했을 때 걸리는 시간과 인건비를 줄일 여지가 크다. 반대로 대면 전문성과 관계가 성과를 좌우하는 업무(고난도 소송, 창의적 설계) 비중이 크면 AI로 대체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
넷째, 규제가 신규 진입은 막되 인수합병(M&A)은 막지 않아야 한다. 자격증이나 인허가가 필요한 업종은 아무나 새로 뛰어들 수 없어 경쟁이 제한되지만, 이미 자격을 갖춘 기존 업체를 사들이는 방식으로는 우회할 수 있다. 이런 업종에서는 인수한 뒤 서비스 조직(MSO) 같은 구조로 브랜드와 백오피스만 통합하고 전문직 면허는 그대로 두는 식의 설계가 흔히 쓰인다.
한국 후보 산업에 대입해보면
이 네 기준을 한국의 구체적인 산업에 대입해보면 몇 가지가 눈에 띈다.
공인중개사 업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난해 10월 기준 영업 중인 공인중개사는 10만9,979명으로 5년여 만에 처음 11만 명 아래로 내려왔고, 11월에는 10만9,616명까지 줄었다. 국내 공인중개사 자격증 보유자는 55만 명에 달하는데 실제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사람은 5명 중 1명 꼴이다.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데다 신규 개업은 급감하고 폐업은 느는 셔프아웃(구조조정) 국면이라, 살아남은 사무소를 묶어 브랜드와 시스템을 표준화하려는 유인이 생기는 시점이다. 다만 개별 거래 단가가 작고 지역 인맥에 의존하는 영업 방식이라 전국 단위 통합의 시너지가 미국의 주택 관리·중개 롤업만큼 클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세무·회계 업계도 조건에 가깝다. 한국세무사회에 등록된 세무사는 1만4,681명이고 이 중 실제 개업한 세무사는 1만4,057명으로, 대부분 1인 또는 소수 인원 사무소다. 신고 대행, 장부 기장, 서류 확인 같은 정형 업무 비중이 커서 미국의 회계법인 롤업이 노린 조건과 상당히 겹친다. 다만 세무사법상 세무 업무는 세무사 자격을 갖춘 사람만 수행할 수 있어, 자본만으로 업무 자체를 흡수할 수는 없고 백오피스·시스템·마케팅을 묶는 서비스 조직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은 미국 사례와 같다.
장기요양기관도 후보로 거론할 만하다. 전국 장기요양기관은 입소시설 약 5천 개, 재가시설 약 1만6천 개를 더해 2만 개 안팎으로 파악되며, 대다수가 소규모 개인사업자 형태로 운영된다. 고령 인구 증가로 수요가 구조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에서 경기 방어적 매출 조건에 부합하고, 배치표·급여 청구·보호자 소통 같은 반복 업무 비중도 크다. 다만 시설 인가와 운영에 사회복지 관련 법령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인수 구조를 짜는 난도가 다른 업종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자동차 정비, 학원, 안경·치과 같은 프랜차이즈형 개인사업 업종들이 비슷한 후보로 거론되지만, 업종별 파편화 정도와 반복 업무 비중을 뒷받침할 만한 공개 통계가 아직 충분히 축적돼 있지 않다.
기준은 갖췄어도 실행은 다른 문제다
네 기준을 만족하는 산업이 있다고 해서 그 산업에서 곧바로 롤업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회계법인 롤업이 본격화된 것은 조건이 갖춰진 지 몇 년이 지난 뒤, 사모펀드가 규제 우회 구조(MSO)를 정교하게 다듬고 나서였다. 한국은 여기에 더해 전문자격사법 체계, 지역 기반 영업 관행, 아직 얕은 M&A 시장 훈련이라는 추가 변수가 있다. 산업을 고르는 기준은 명확해지고 있지만, 그 기준에 맞는 산업을 실제로 사 모으는 조직적 자본이 나타나는지가 다음 관찰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