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AI 롤업이 아직 없는 이유 — 승계 절벽이 만드는 기회
앞선 글에서 미국의 AI 롤업(AI Roll-up)을 만든 세 조건 — 승계자 없는 오너의 은퇴, 추론 비용의 하락, 갈 곳 없는 사모 자금 — 을 정리하면서 한국은 그중 첫 번째 조건인 오너 고령화와 승계자 부재를 미국 못지않게 갖추고 있다고 짚은 바 있다. 실제로 숫자를 보면 격차가 없다기보다 오히려 한국 쪽이 더 급하게 보인다. 그런데도 이 매물더미를 겨냥해 조직적으로 자본을 투입하고 AI로 개조하겠다는 플레이어는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왜일까.
매물은 이미 쌓여 있다
중소벤처기업부 집계로 2022년 기준 대표이사가 60세 이상인 중소기업은 236만 개에 이른다. 제조업만 놓고 보면 대표자가 60세 이상인 비중이 2010년 13퍼센트에서 2023년 36.8퍼센트로 3배 가까이 늘었다는 조사도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25년 발표한 '기업승계 실태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600개사 가운데 대표자 연령이 60~70세 미만이 41.7퍼센트, 70세 이상이 25.0퍼센트로 나타나 응답 기업의 3분의 2가 이미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은행 기업승계지원센터가 협약을 맺은 554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도 50~69세 70.2퍼센트, 70세 이상 20.5퍼센트로 비슷한 그림이었다.
문제는 이 중 상당수가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언론 보도는 후계자 없는 60세 이상 대표 기업이 약 67만~67만 5천 개, 60세 이상 대표 기업 전체의 약 4분의 1 안팎에 이른다고 전한다(추정치는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승계형 매각 대상 중소기업이 2022년 21만 개에서 2034년 31만 개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흑자를 내고 있는데도 팔 곳을 못 찾아 폐업하는 회사가 나온다는 뜻이고, 이 자체가 미국의 '실버 쓰나미'와 구조적으로 같은 이야기다.
매물은 있는데 조직적 매수자가 없다
미국에서는 이 공급을 놓고 제너럴 카탈리스트(General Catalyst)나 스라이브 캐피털(Thrive Capital) 같은 투자사가 전용 펀드를 만들어 회계법인·법률사무소·홈서비스업체를 사 모으고 있다. 한국에서는 왜 같은 그림이 아직 나오지 않을까. 몇 가지 구조적인 이유를 짚어볼 수 있다.
첫째는 세제다. 한국의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지금까지 오너의 자녀 등 친족 승계를 전제로 설계돼 있었고, 제3자에게 회사를 파는 방식의 승계에는 별도의 세제 혜택이 없었다. 오너 입장에서 자녀에게 물려주면 상속·증여세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지만, 사모펀드나 전략적 매수자에게 팔면 그런 혜택이 없으니 굳이 팔 유인이 약했던 셈이다. 이 문제는 정책 당국도 인지하고 있어서, 2026년 세제개편안에 처음으로 제3자 인수합병 방식의 기업승계에 대한 세제 지원이 담겼다. 보도에 따르면 2028년부터 매도인(60세 이상, 20년 이상 계속 경영)에게는 양도소득세를 20퍼센트, 매수인(같은 업종 10년 이상 경영 법인이거나 5년 이상 재직한 임직원)에게는 소득·법인세를 5년간 10퍼센트 감면하는 구조가 논의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흔한 승계 통로가 '팔기'가 아니라 '물려주기'였고, 이 세제 변화가 실제로 시행되고 정착돼야 비로소 제3자 매각이라는 선택지가 오너들에게 자연스러워진다는 뜻이다.
둘째는 자본의 크기와 성격이다. 국내 기관전용 사모펀드(PEF)는 2023년 말 기준 1,098개, 운용자산(AUM) 총합은 136조원 규모로 집계된다. 미국 사모펀드 업계 전체의 미투자 자금(드라이 파우더)만 약 1조 달러(환율에 따라 1,400조원 안팎)에 이른다는 점과 비교하면 시장 자체의 크기가 다르다. 여기에 국내 M&A 시장은 여전히 거래 규모가 작다. 중소·벤처기업 M&A는 연평균 356건, 건당 평균 거래액 391억원 수준으로, 개별 회사를 사서 규모의 경제를 만드는 '롤업'보다는 단발성 지분 인수나 자금 회수 목적의 거래가 많다. 시장 참여자들이 승계형 매물을 조직적으로 사 모으는 훈련 자체가 아직 두텁지 않다는 뜻이다.
셋째는 통합 이후의 실행 여건이다. 미국식 AI 롤업은 인수한 회사의 반복 업무(견적, 정산, 예약, 고객 응대)를 에이전트로 재설계해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가치를 만든다. 그런데 대한상공회의소가 2026년 상반기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생성형 AI 활용률은 66.5퍼센트인 반면 중소기업은 52.7퍼센트에 그쳤고, 도입 로드맵이 아예 없다는 응답도 중소기업 쪽이 70.4퍼센트로 대기업(54.4퍼센트)보다 16.0퍼센트포인트 높았다. 인수 대상이 될 만한 회사들 자체가 아직 AI로 업무를 재설계할 준비가 덜 돼 있다는 뜻이고, 이는 인수 후 통합(PMI) 과정에서 시간이 더 걸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건은 갖춰지는 중이다
세 가지 장벽 모두 고정된 게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제는 2028년 시행을 목표로 제3자 매각의 유인을 처음으로 만드는 중이고, 정부는 승계형 M&A를 위한 특별법과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PEF 시장도 고금리 국면에서도 AUM이 꾸준히 늘어왔다. AI 활용 격차 역시 대한상공회의소 분석에서 조직 환경(도입 로드맵, 교육, 가이드라인)을 갖추면 기업 규모에서 비롯된 순수 격차가 13.8퍼센트포인트에서 4퍼센트포인트까지 줄어든다고 나타난 만큼, 기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도입 체계의 문제에 가깝다.
다만 조건이 갖춰지는 것과 실제로 조직적인 매수자가 나타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미국에서도 롤업 전용 펀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시점은 승계자 부재 통계가 알려진 지 한참 뒤, 추론 비용이 충분히 떨어지고 사모 자금의 출구가 막힌 뒤였다. 한국은 승계 절벽이라는 조건은 갖췄지만 세제·자본시장·AI 도입 체계라는 나머지 조건이 아직 다 갖춰지지 않은 중간 단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언제, 누가 이 매물더미에 조직적으로 뛰어드는지가 다음 관찰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