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텍트 에이전트 — 에이전트를 만드는 에이전트
경영 자문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요청을 받는다. "AI 에이전트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이 업무 처리하게." 처음엔 나도 그 요청 그대로 받아서 일했다. 프롬프트 하나, 도구 몇 개 붙여서 잘 도는 에이전트 하나를 넘겨드리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번 반복해보니 패턴이 보였다. 한 달쯤 지나면 반드시 다음 요청이 온다. "이 에이전트가 저 시스템이랑도 연동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한 달 지나면 "이 판단은 사람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기준을 에이전트가 먼저 걸러줬으면 해요." 결국 에이전트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에이전트,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무슨 일을 언제 넘기는지 정하는 상위 설계가 필요했던 거다. 나는 매번 시공을 먼저 하고 설계도를 나중에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업무는 단일 작업이 아니라 역할의 조합이다
경영자가 "이 업무를 AI로 처리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업무는 이미 머릿속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있다. 하지만 실제로 뜯어보면 그 안에는 여러 역할이 섞여 있다. 정보를 모으는 역할, 판단 기준에 맞춰 거르는 역할, 사람에게 보고할 형태로 정리하는 역할, 승인이 떨어지면 실행하는 역할. 사람 조직에서는 이게 자연스럽게 여러 명에게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경계를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에이전트로 옮기는 순간 그 경계가 노출된다. 하나의 거대한 프롬프트에 이 역할들을 다 욱여넣으면 처음 몇 번은 그럴듯하게 돌아가다가, 예외 상황이 오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알 수 없는 블랙박스가 된다. 역할을 나누고, 각 역할이 다음 역할에게 무엇을 넘기는지 정의하는 일 — 이게 실행 에이전트를 짜는 일보다 먼저 와야 하는 설계 작업이다.
아키텍트 에이전트라는 레이어
그래서 필요한 게 아키텍트 에이전트다. 이 에이전트의 일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업무를 몇 개의 역할로 쪼갤지, 각 역할을 어떤 에이전트에게 맡길지, 그 에이전트들 사이의 순서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짤지를 설계하는 것이다. 건축에 빗대면 이해가 쉽다. 건물을 짓는다고 할 때 벽돌을 쌓는 사람과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설계도가 없으면 벽돌공이 아무리 숙련돼 있어도 건물 전체의 구조는 산으로 간다. 아키텍트 에이전트는 이 설계도를 그리는 역할을 맡는다. 실행 에이전트를 만드는 것 자체도 에이전트가 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매번 "이런 에이전트를 만들어줘"라고 요청서를 쓰는 대신, 아키텍트 에이전트가 업무를 분석해서 필요한 에이전트의 구성과 역할 분담을 먼저 제안하고, 사람은 그 설계를 승인하거나 수정 지시만 내린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은 확장성이다.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날 때마다 사람이 처음부터 설계를 다시 하는 게 아니라, 아키텍트 에이전트가 기존에 만들어둔 역할들 중 재사용할 수 있는 게 있는지부터 판단한다. 정보를 모으는 역할은 이미 있으니 재사용하고, 새로 필요한 건 판단 기준을 하나 추가하는 역할뿐이라는 식이다. 회사가 커질수록 새 업무마다 새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인력이 겸직하며 대응 범위를 넓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람은 고부가 판단에 집중하고, 반복되는 설계와 배치는 아키텍트 에이전트가 먼저 초안을 만들어두는 구조다.
사람이 남아야 하는 지점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다. 아키텍트 에이전트가 설계를 제안한다고 해서 그 설계가 곧바로 실행되는 건 아니다. 어떤 역할을 어디까지 에이전트에게 맡길지, 어떤 판단은 반드시 사람이 최종 승인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아키텍트 에이전트는 설계안을 만드는 참모지 결재권자가 아니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회사는 자기가 무엇을 자동화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굴러가게 된다. 좋은 아키텍트 에이전트는 오히려 이 경계를 더 선명하게 그려준다. "이 역할은 실수해도 되돌릴 수 있으니 에이전트가 처리하고, 이 역할은 되돌릴 수 없으니 사람이 봐야 한다"는 판정을 설계 단계에서부터 명시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에이전트 도입의 다음 단계는 에이전트를 하나 더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를 설계하는 일 자체를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시공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설계도가 없으면 건물은 오래 못 간다. 좋은 아키텍트 하나를 회사 안에 심어두면, 그다음부터 짓는 모든 건물이 더 빨리, 더 튼튼하게 올라가길 바래본다.